혹시나 하며 설레던 마음은 기억 어디쯤에 봉인되어 있는 걸까? 오토바이가 지나간 골목에는 겨울 햇살만이 기억처럼 낡아간다.
좁고 낡은 골목에 비가 내린다. 오래전 입춘도 지났으니 봄비가 틀림은 없으련만 골목엔 아직도 겨울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이 비 그치고 귓가에 바람이 살랑거리면, 담장 아래 다시금 새싹이 돋아나면,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면 봄이 온 것일까? 정말로 그 봄이 다시 온 것일까?
이 깊고도 높은 언덕 골목의 끝은 어디쯤일까? 골목을 바삐 오르는 사람의 발소리도, 그것을 지켜보는 나도 숨이 가쁘다.
오후가 저문다. 마치 낙엽처럼, 노년처럼, 그렇게 오후가 저문다. 내 청춘의 봄날은 다 어디 가고 희미한 봄날의 기억만 편린처럼 남아 이렇게 저물어 가는 것인가? 혼자 돌아가는 귀갓길은 또 얼마나 멀고 캄캄할까?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린다. 짙은 커피를 마시면서도 달달한 다방커피가 또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낡은 사진의 달달한 그 맛이 그리운 것일까? 아니면 실없는 농담이 오가는 다방의 달달한 풍경이 새삼 그리운 나이가 된 것일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사진을 들여다본다. 도시의 한 켠이 마치 커피처럼 쓰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오후가 또 길게 눕는다. 날마다 짙어지는 봄 햇살에도 바이러스는 온통 도시를 엄습하고 침묵의 불안한 그림자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언제쯤이면 햇살이 다시금 햇살이 되고, 그림자가 그림자가 되며 봄 결 위를 상큼 걷는 발걸음이 될까?
몇 년 간의 시간만으로 타인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골목에 적을 두고 그들과 부대끼지 않는 이상 이 골목을, 이 마을의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나는 이 골목을 서성이는 타인의 그림자와 같다.
가족 모두가 어디를 가는 것일까? 아니면 이 골목 어느 집을 다녀오는 것일까? 가뜩이나 낡고 휑했던 골목이 모처럼 환해졌다. 그래! 가족이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