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봉교와 수성교 사이에 겨울 강이 흐르고 센트로펠리스와 동부교회 사이에는 세련된 도시의 욕망이 그림자처럼 이어져 있다. 오랜 시간, 서로를 비켜 온 당신과 나 사이에 무엇이 남아 있길래 마음 한켠이 이토록 아린가? 눈 비비고 강 속을 들여다보니, 아득한 기억이 꿈결처럼 잠들어 있다.
대봉교와 수성교 사이에 겨울 강이 흐르고 센트로펠리스와 동부교회 사이에는 세련된 도시의 욕망이 그림자처럼 이어져 있다. 오랜 시간, 서로를 비켜 온 당신과 나 사이에 무엇이 남아 있길래 마음 한켠이 이토록 아린가? 눈 비비고 강 속을 들여다보니, 아득한 기억이 꿈결처럼 잠들어 있다.
이른 아침의 신천은 수묵화 느낌이 난다. 마치 안개와도 같은 농담(濃淡)은 도시의 모호함과, 욕망과, 그 짙은 그림자마저도 품는다. 저 잠잠한 강 어디쯤에 내 청춘의 기억이 잠겨 있을까? 바람 한 점 없는 이른 아침, 신천에서는 모든 것이 풍경이 된다.
홍차를 마시다 문득 떠 올렸다. 파키스탄 홍차보다 더 아린 맛이 묻어나는 담쟁이 벽을 떠 올렸다. 메마른 시간을 넘어 내 가슴에 자라난 담쟁이는 어느 거리의 오후에서 잊히게 될까? 벽 속에 나를 끌어다 묻는다.
동인동 끝자락 동부시장은 그 긴 시간의 끝에 서 있다. 도시에서 어쩌면 재개발은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수십 년 이곳의 삶은 또 어디로 옮겨가 희미한 기억으로 남게 될까? 다시금 '김해통닭'의 닭볶음탕을 맛볼 수나 있을까? 어둑한 골목의 전등이 자꾸만 희미해진다.
지하도를 지난다. 지하도 이쪽에서 저쪽의 빛을 들여다본다. 출구와 입구의 결정은 양자역학의 관점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어쩌면 본다는 것,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리라.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소묘(素描)의 계절이 왔다. 까쓸까쓸한 소묘의 계절이 왔다. 나무들은 저마다의 살갗을 온전히 드러내고 세련된 욕망과, 빌딩 뒤의 허무한 그림자와, 눈길조차 없는 차가운 도시의 소리는 점점 더 확연해진다. 때로 검거나 흰 것이 더 명확할 수도 있는 법이지만 마른 시선으로 어찌 젖은 삶의 너머를 볼 수 있을까? 풀잎이 눕는 강 너머로 소묘의 계절이 또 찾아왔다.
때로는 산다는 것이 외발자전거를 타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균형을 잃는 한순간에 넘어지는 것이 비단 이것뿐만은 아니겠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그 위태스러운 모습이 닮았다.
사진에 있어 구도가 주는 불안정성은 불편함과 더불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어떤 피사체는 그 불안한 무게의 힘을 충분히 견뎌낼 뿐만 아니라 균형을 만들기도 한다.
사진도, 산다는 것도 그런 것은 아닐까? 중심을 잃지 않으면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있는 무게와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신천교 아래로 자전거들이 달려 나갔다. 지나온 시간들을 뒤에 두고, 때로는 기억을 묻어두며 그렇게 줄지어 달려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 빛나는 아침햇살을 향해 달려가는 많은 사람들의 앞날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슬픔보다 기쁨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기억이 과거와 현실의 모자이크듯이 징검다리는 과거와 현실을 이어주는 통로와도 같다. 그 징검다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앞서간 시간도, 함께 가는 세대도, 뒤따르는 회한도 기억이 되어 강에 쌓인다. 그리하여 어느 날 문득, 징검다리에서 건져 올리는 눈부신 기억의 비늘들이여!
별것 없는 거리에 늘 붙는 '폐업 정리' 전단이 바람에 날린다. 저런 류의 전단이 어제오늘은 아니지만 텅 빈 거리와 어쩌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걸음과 몸짓을 통해 또 다른 현실이 된다. 사진도, 산다는 것도 참 쉽지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