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과 면(面)이 만나면 공간(空間)이 된다. 공간은 다시 누군가의 기억(記憶)이 되고 기억은 시간(時間)의 흔적(痕跡)으로 남는다. 고분군에서 나는 아득한 선과 면의 기억을 더듬고 있다.
선(線)과 면(面)이 만나면 공간(空間)이 된다. 공간은 다시 누군가의 기억(記憶)이 되고 기억은 시간(時間)의 흔적(痕跡)으로 남는다. 고분군에서 나는 아득한 선과 면의 기억을 더듬고 있다.
오후, 염매시장(廉賣市場) 골목은 마치 혼잡한 터널처럼 번잡스럽다. 입구와 출구 모두 어묵집이 성황이다. 그런 탓에 한결 더 시장이 시장다워지는지도 모르지만 어디 '삶'이 '시장(市場)'에만 있으랴? 저마다의 시간은 그 길 위에서 번성하기도 하며 때로는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것임을, 삶이란 그저 그런 것임을...
안개 같은 먼지를 뚫고 해가 솟아오르는 소리, 멈춘듯한 강 아래로 물이 흐르는 소리, 깃털보다 더 가벼운 새의 날갯짓 소리,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봄이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 아! 세상은 온통 '소리'로 가득하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또는 무엇을 만나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것은 오래전 망각한 모태(母胎)의 기억 한 조각 인지도 모른다.
달리는 자동차나 기차, 또는 무빙워크에서의 시간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어쩌면 프레임에 갇힌 세상 또한 그러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내가 보는, 내가 속한 세계는 항상 순방향이며 반대의 세계는 함께할 수 없는 역방향의 시간이다. 이 티끌만 한 공간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한 방향만 바라보는 고깔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묘(素描)의 계절이 왔다. 까쓸까쓸한 소묘의 계절이 왔다. 나무들은 저마다의 살갗을 온전히 드러내고 세련된 욕망과, 빌딩 뒤의 허무한 그림자와, 눈길조차 없는 차가운 도시의 소리는 점점 더 확연해진다. 때로 검거나 흰 것이 더 명확할 수도 있는 법이지만 마른 시선으로 어찌 젖은 삶의 너머를 볼 수 있을까? 풀잎이 눕는 강 너머로 소묘의 계절이 또 찾아왔다.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계단을 바삐 오르는 숨 가쁜 소리에 한여름의 더위가 그대로 묻어난다. 전쟁과도 같은 이 계단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나무가 눕는다. 고분 위에 그림자로 누운 나무는 오래도록 꿈을 꾼다. 지난 가을의 그 짙었던 향기와, 금계국 위로 무수히 쏟아지던 여름날의 푸른 별빛이며, 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봄날의 바람결과도 같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젊은 날들의 초상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 겨울,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가련한 꿈을 꾸는 것은 어쩌면 나무가 아니라 나 인지도 모르겠다.
징검다리를 건너다 멈춰 선 그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저 일렁이는 심연에 무엇이 있길래 저리도 골똘한 모습으로 강을 응시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문득 마음의 소리는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