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에 구름이 가득하다. 어느 먼 곳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구원이 보이지 않는 신전의 세상에서 변화도, 혁명도 어쩌면 그렇게 오는 것이리라.
신천에 구름이 가득하다. 어느 먼 곳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구원이 보이지 않는 신전의 세상에서 변화도, 혁명도 어쩌면 그렇게 오는 것이리라.
보이지 않을 때, 더 멀리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빌딩과, 하늘과, 그리고 다리와 먼산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것들을 넘어 석양에 빛나는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던 것들은 정녕 무엇이었을까? 문득 가슴이 뛰고, 나도 작은 바위처럼 아득한 봄날의 꿈을 꾼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난 빈자리에 저녁이 물들기 시작한다. 세월은 그렇게 강물처럼 흘러 지금에 왔는데 이제는 흔적마저도 희미한 그 기억의 그림자는 마치 환등기의 한 장면처럼 멈춰서 있다. 어쩌면 기억의 강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잠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어느 날 문득, 물고기처럼 솟아올라 햇볕에 반짝이는 비늘로 온통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천으로 가자. 좁고도 짧은 지하도를 지나, 햇살 눈부신 그곳으로 가자. 걸어서 가면 어떻고 자전거를 타면 또 어떠랴? 오후의 햇살이 타는 듯 가슴에 박혀도 그곳으로 가자. 피 흘리는 가슴 부여잡고 짙푸른 수의를 입은 그녀가 손짓하는 그곳으로 가자.
소묘같이 까슬한 흑백의 시간도 이제는 보내야 할 때다. 도둑과도 같은 봄날은 사방에서 아우성인데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겪어야 다시 너를 만나게 될까? 보내는 모든 것들은 아쉬움이 남는 법이라지만 봄꽃보다 더 짙은 이 그림자는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
적당한 거리(距離)가 필요할 때가 있다. 아주 가깝지도, 아주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리하면 모든 것들을 다 설명하고 보여줄 필요도 없이, 드러내서 강조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러하고 자연과의 교감도 그러하며, 본질에 대한 깨달음 또한 그러하리라.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전해지는 긴장감이 요즘은 참으로 좋기만 하다.
낡고 빛바랜 포장 사이로 어둑한 시장 골목길이 드러난다. 지나는 사람이야 얼마 되지도 않고, 그 흔한 좌판도 이제 보이지 않지만 세월의 그림자는 곳곳에 얼룩처럼 남아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시장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별반 다를 것이 무엇인가? 시장의 길이 다하면 다른 길로 이어지듯, 내 삶의 길도 다하면 어디로 이어질까? 차라리 영영 소멸(消滅) 이었으면 좋겠다.
시장 뒤, 골목길을 지나간다. 어제를 지나, 오늘을 넘어, 내일의 길을 꼬불꼬불 지나간다. 플라타너스 잎이 바람에 흔들려 바스락거리고 짙은 커피향이 골목에 흔적처럼 남아 있다. 내 삶의 뒤안길도 이러할까? 시장 뒤, 어둑한 골목길을 나 홀로 걸어가고 있다.
터널과도 같은 시장 골목에 서서 나는 그들의 일상과 눈빛을 애써 외면한 채 나의 시간과 나의 사랑을 떠 올린다. 입구와 출구는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마음은 자꾸 밖으로만 향한다. 이 오래된 시장 골목에 그림자처럼 누워있는 흔적은 무엇일까? 어쩌면 나는 아직도 지나간 시간과 빛바랜 사랑을 더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