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다. 풀 잎이 저렇게 누울 수 있다는 것을, 쓰러진 풀잎이 서 있는 나무보다 더 오래도록 내 유년의 기억을 품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풀 잎이 저렇게 누울 수 있다는 것을, 쓰러진 풀잎이 서 있는 나무보다 더 오래도록 내 유년의 기억을 품고 있다는 것을...
역 플랫폼에 서면 언제나 설렌다. 아득한 시절, 철길 위를 지나는 기차소리가 가슴속 깊은 곳에 박혀있는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역 플랫폼에 들어서면 아직도 가슴이 저만치서부터 뛴다. 저 빛살의 폭포 사이를 사이를 가르고 금방이라도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들어설듯하고 나는 엄마 손을 꼭 쥔 일곱 살 소년이 된다. 기억의 치환(置換)이란 이런 것인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나를 찌르고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또는 무엇을 만나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것은 오래전 망각한 모태(母胎)의 기억 한 조각 인지도 모른다.
강 속, 도시의 해는 조금 더 늦게 떠오른다. 공간이 상대적인 것처럼 그렇게 시간도 상대적으로 흐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누군가의 기억이라는 공간 속에서 또 다른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이제는 희미한, 그 스무 살의 아침이 아리도록 그립다.
잊고 있었다. 불현듯 그때의 그 골목이, 기억마저도 희미한 그 친구들이 이제야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굽은 골목은 더 이상 길지도, 넓지도 않은데 오랜 시간을 돌아온 이 골목에서 내가 마주한 편린과도 같은 기억은 무슨 까닭으로 이리도 아린 것일까? 골목 끝으로 지는 햇살이, 오후의 그림자가 참으로 짙다.
동네의 낡은 집들과 좁은 길은 어쩌면 기억 속의 그림자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때로 겨울바람과 오후의 짧은 햇볕이 그림자로 남고 또 그 그림자를 밟으며 스치듯 지난 사람들도 이내 그림자로 남는다. 그래! 기억이란 이렇게 쌓이는 것을, 나도 그렇게 그림자가 되는 것을...
이른 아침의 신천은 수묵화 느낌이 난다. 마치 안개와도 같은 농담(濃淡)은 도시의 모호함과, 욕망과, 그 짙은 그림자마저도 품는다. 저 잠잠한 강 어디쯤에 내 청춘의 기억이 잠겨 있을까? 바람 한 점 없는 이른 아침, 신천에서는 모든 것이 풍경이 된다.
기억이 과거와 현실의 모자이크듯이 징검다리는 과거와 현실을 이어주는 통로와도 같다. 그 징검다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앞서간 시간도, 함께 가는 세대도, 뒤따르는 회한도 기억이 되어 강에 쌓인다. 그리하여 어느 날 문득, 징검다리에서 건져 올리는 눈부신 기억의 비늘들이여!